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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

Somtul 2024. 9. 6. 03:01


 
  그 결혼식은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했다. 

  테사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아무런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나의 자매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우리 자매들이 뜻이 맞는 건 굉장히 드물었고, 그날은 그 희귀한 날 중 하나였다. 어젯밤, 나는 느지막이 정문을 넘어 들어온 마차를 보았다. 그 덜컹거리는 것을 타고 한 여성이 이 저택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짐이랄 것도 없던 그 여자는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방을 받았고,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궐련을 빼 물었더랬다. 한 층 짙어진 저택의 매캐한 향에 난 머리를 빗겨주던 시녀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결혼식 전날에 궐련을 피우는 신부가 어디 있어? 

  콜슨 가의 이름을 걸고 제법 경건하게 이루어지곤 했던 결혼식은 회차를 지날수록 발악이라도 하는 것처럼 더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콜슨 경이 또 다른 아내를 들이는 것은 아직도 장자를 얻지 못했단 의미이고, 네 번째 부인을 잃었을 때즈음엔 '콜슨'이란 이름은 주변 귀족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어 있었다. 수많은 여자를 먹이고 재우느라 쓰인 재화가 아무리 빛을 발해도, 그 이름이 비석 위에서 흐려지고 종국엔 사라질 것이란 점은 부정할 수 없는 탓이다. 그 사실은 이 저택의 여자들을 미치게 만들었고, 어쩌면⋯ 우리의 아버지마저도 그렇게 만든 듯 했다.

  나를 제외하고.

  당연하지! 나는 미치지 않았다. 제정신을 잃는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자면, 나를 낯선 가문에 데려온 남자가 더 이상 나를 상종도 해주지 않는다거나, 그것을 보며 사용인이라는 것들이 날 하대한다거나. 계집의 몸으론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바라며 밑 빠진 병에 물을 붓고, 그래서 이 큰 저택에 득시글거리는 시선들이 모두 나를 꾸짖는 것 같이 느껴진다거나. 아니면, 그 모든 수모마저도 겪을 자격이 없어 아예 헐값에 팔려나간 신부가 된다거나⋯⋯. 모두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의연하다. 애처로운 미치광이들이 넘치는 저택에서 나와 내 사랑스러운 어머니만큼은 언제까지나 온전할 것이다.


  날이 밝자 나와 내 자매들은 각자의 방에서 조찬을 들었다. 차를 한 모금 들이켰을 때 사용인이 정오에 식이 있을 예정이라고 내게 알려주었다. 결혼식은 성급했고 성대했다. 숱한 귀족들의 결혼식처럼 상대 가문에 대한 체면을 차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우습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여섯 번째 여자는 딱 그 정도면 충분했다.

  "마음대로 하셔야죠." 

  난 무신경하게 답했다. 아버지의 결정에 관한 의문들은 애초에 들지도 않았다. 또 어머니를 들이냐느니, 이미 있는 자들은 어쩌냐느니 하는 생각 또한,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무관심했고 그렇기에 그들이 가족이란 멍에 속에서 무슨 행각을 벌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되길 원하고, 내가 될 수 없다. 그거면 충분했다. 지나치게 많은 자매 덕에 하객이 부족하진 않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을 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내가 보아도 나는 가끔 짓궂을 때가 있다.

  여섯 번째 부인의 흰 드레스는 분명 새하얀 옷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정물의 색을 띠었다. 그에게선 다섯 번째 부인의 치기와 야망도, 세 번째 부인의 질투와 교태도, 첫 번째 부인의 애석함과 고루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머리카락은 제니퍼를 떠올리게 했고, 주름 하나 없는 살갗은 나와 비슷했다. 나는 커다랗기만 한 부케를 들고 가만히 서 있는 그가 자식을 낳고 기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려 했지만 도저히 나아갈 수 없었다. 그는 어쩌면 나의 어머니와 같은 선택받은 아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으나, 그에겐 어머니의 표정이랄 것이 없었다.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오직, 간혹 나의 어머니가 짓고는 하셨던, 모든 것이 권태로운 낯뿐이었다. 

  "아내가 되어 남편을 사랑하고 섬길 것을 맹세합니까?"
  "⋯⋯네."

  나는 곧 모든 생각을 지웠다. 내가 착각을 한 모양이다. 그의 표정은 그저 지친 표정일 뿐 나의 어머니와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팔려 온 여자에게 생기가 남아있길 기대할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다. 
 


 

  "나의 어머니라면 내가 이런 결혼을 하게 두진 않으셨을 거예요."

  무심코 나온 말을 뱉고선 나는 무마하듯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가 궐련을 피우기 위해 내 옆의 창문으로 다가왔을 때였다. 듣는 사람은 그와 나 단 둘뿐이었다. 짓궂은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때를 틈타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너의 위치는 그곳이라고. 나의 어머니는 너의 어머니와 다르며, 같은 정원사가 심어둔 풀을 밟고 같은 사용인이 조리한 음식을 먹어도 우리가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

  바람이 내 쪽으로 불어와 그가 태운 궐련의 연기가 코끝을 스쳤다. 마른기침을 내뱉자, 말이 없던 그 여자는 그제야 바스러진 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곤 그대로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새 부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내뱉는 말을 듣고야 말았다. 이제 나도 너의 어머니야. 


  피로연을 앞두고 나는 방에 처박혀서 몇 번이고 멀쩡한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분홍색 천이 충분히 예쁘고 밝지 않다느니, 초록색은 불길해 보인다느니, 빨간색은 천박해 보인다는 둥 갖가지 트집을 잡으며 두 명의 시녀가 달라붙어 입혀준 옷을 삽시간에 내팽개쳤다. 코르셋을 조이는 손길이 너무 거세다며 시녀를 밀쳐 넘어뜨린 후엔 목에 걸어둔 보석이 충분히 빛나지 않는다고 소리를 질렀다.

목적 없이 분을 쏟아내던 난, 곧 장롱 위에 놓아둔 자수 더미로 시선을 옮겼다. 그 위에는 몇 주를 공들여 놓은 아름다운 꽃다발 형상의 자수가 있었다. 몇 수만 더 놓으면 완성이 될 직물은 아마 식탁보, 손수건, 또는 태피스트리가 되어 이 저택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일순 나는 자수를 놓은 천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말릴 새도 없이 바구니에서 쪽가위를 들어 천의 가장자리에 가져다 대었다. 약하게 힘을 주면 실이 한 올 한 올 뜯어지며 꽃봉오리가 개화하듯 사방으로 벌어졌고⋯⋯ 나는 가위질을 멈추었다.
 

  모든 게 우습게 느껴졌던 탓이다. 안쓰러운 사연의 딱한 여자 하나 때문에 분에 차오른 내 모습이 사랑스럽지 않게 느껴진 탓이다. 뜯어진 부분은 몇 수만 더 놓으면 금세 고칠 수 있을 터였다. 완벽한 나의 어머니는 망가진 자수를 고치는 데에도 도가 텄었고, 나 또한 이 정도 손상은 성가신 축에도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이 괜찮았다.

  "역시 분홍색 드레스가 좋겠어."

  나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시녀가 입혀주는 옷을 순순히 입었다. 그리고 넘어뜨렸던 시녀의 앞치마 속에 앤에게 빌렸던 반지를 몰래 넣었다. 이 행위는 동생이 언니에게 행하는, 일종의 부탁이었다. 날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은 언니 된 자로서 대신 치워달라는. 사랑스러운 한나 콜슨의 부탁.



-


  일주일 뒤는 나의 결혼식이다.

  본래라면 더 일찍 이루어져야 할 식이었지만, 첫 번째 혼사를 의도치 않게 그르친 뒤 나의 어머니에겐 깊은 근심이 깃든 듯했다. 우린 모두 완벽한 딸이었지만 나이가 찼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누구도 여자로서 온전해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앤의 약혼자는 모종의 사정으로 사라졌고, 제니퍼는 지나치게 까다로워 몇 번이고 중매쟁이를 바람맞혔으며 나의 쌍둥이는 어머니의 뜻을 이루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머니의 곁에 더 머무를 수 있단 사실에 마냥 기뻐했던 난 조금씩 조급해졌다. 머지않아 두 번째 혼담이 들어왔고 나는 또 한 번 ‘모두 좋다’고 대답했다. 어머니가 고른 두 번째 상대는 첫 번째보다는 못한 자였지만, 나는 까다롭게 구는 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서신에 따르면 그는 사냥과 승마를 즐기는 두 살 위의 사내이고, 콜슨 가와 마찬가지로 지방에 저택과 부지를 지니고 있는 가문의 셋째이며, 형제와 자매를 대여섯 명 정도 두고 있다고 하였다. 혼담을 나눌 때 그의 가문은 콜슨의 가장 사랑스러운 여식을 원한다고 하였고 그것을 전해 들었을 때 나는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물론, 나는 그의 얼굴을 모른다.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도 당연히 모른다. 그저 그가 나를 원했다는 것만 알고 있다.

그것도 이젠 벌써 한 달 전의 일이다. 달이 차고 기우는 동안 나의 저택 안은 식을 준비하며 꽤나 축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시녀들은 나를 마주칠 때마다 사랑에 빠진 여름의 장미처럼 아름답다는 칭송을 해주었다. 어머니는 내가 보일 때면 근심 하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자매들은 나를 걱정해 주는 동시에 축복해 주었다. 아끼는 자매를 떠나보낸다는 것이 애달팠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의 손을 마주 잡아줄 때면 전에 없을 애틋함을 느꼈다.

 


  나의 삶은 송두리째 뒤바뀌고 있었지만, 산기슭에 외따로이 세워진 콜슨 가의 거대한 저택은 2주 전 쏟아진 비로 인해 지붕에 녹이 슬었다는 점 이외에는 변한 것 없이 그대로였다. 망가뜨릴 뻔했던 꽃다발 형상의 자수는 무사히 완성되어 지금은 식당 벽 한편에 아름답게 걸려 있다. 식당을 나와 정문으로 향하는 복도를 거닐면 아버지의 초상화 옆에 차례대로 어머니들의 초상화가 보인다. 몇 번이고 헤지고 망가져 덧대어 그린 흔적들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다섯 개의 액자 모두 고아하고 아름다운 형상을 담고 있었다. 캔버스에 박제된 여자들은 그 주인과 달리 나이 들지 않았고, 미치지도 않았으며, 그저 그 자리에서 낡아만 갔다. 나는 새 액자를 걸기 위해 비워둔 벽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섯 번째 부인의 초상화는 아직 그리고 있는 중이라 했다. 그 탓에 응접실 앞을 거닐 때면 유화 물감 냄새가 코끝에 진동을 했다.

  여섯 번째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자면, 그는 아직 어머니가 되지는 못했다. 첫날 밤, 아버지를 바람맞힌 것도 모자라 그는 여즉 아버지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 집을 비우지 않는 날의 저녁이면 우리는 식당에 모여 긴 식탁에 마주 앉아 함께 식사를 했다. 멀리 있는 가족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나의 곁, 또는 앞에 있는 가족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내어주는 음식을 비운다. 아버지께선 식사의 시작과 끝을 제외하곤 대화랄 것을 하지 않는데, 식사를 마쳐갈 때가 되어서야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곤 했다. 그 누군가는 보통 우리들의 어머니 중 한 명이다. 그 시간이 되면 우리는 모두 하던 말을 멈추고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오늘은 새 부인의 방에 가겠다고 말하면,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옆 사람과 시선을 교환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로선 그가 어떠한 자격으로 이 저택에 남아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오늘과 같은 날이면 헝클어진 머리와 얻어맞은 몰골을 하고서 저택을 배회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런 밤이면 저택 안의 모든 시녀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발을 끄는 소리가 길고 미련해진다는 소문도. 그리고 꼭 그 망할 궐련을 물고서, 하루하루 고비를 넘긴다는 이야기까지. 누군가는 그가 특혜를 받는다며 불평했지만 난 그저 그 아집이 얼마나 갈지 궁금할 뿐이었다.


  다시 나의 이야기를 할까? 그동안 나는 첫 번째 약혼이 파투 난 뒤 멈추었던 신부 수업을 재개했다. 한 달 내내 교사가 나를 쫓아다니며 쏟아붓는 지식과 훈계들은 지겹지만, 흥미롭기도 했다. 나는 수를 놓고 바느질하는 법과 사교계에서 그럴듯한 여성이 되는 법, 그밖에 이미 내가 알고 있던 수많은 교양을 익혔다. 현명한 부인이 되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하는 시간은 고역이었지만, 어차피 남편 될 자가 내게 바라는 현명함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남편을 만족시키는 법을 배웠을 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낯부끄러운 것들을 가르쳐주는 가정교사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다소곳이 앉아 파렴치한 상상을 했다. 내가 그를 바라볼 때면 그는 내 시선을 피했지만, 나는 끝까지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 교사도 나를 소재 삼아 그러한 상상을 하곤 했을까? 당연히 그랬겠지.

나는 밤마다 머리카락에 향유를 펴 바르며 막연한 기대감에 잠겼다. 얼굴도 목소리도 모를 그를 상상했다. 날 이 저택에서 데리고 나가줄 그를. 이 향을 맡으며 그는 내게 향기롭다고 할까? 아니면, 아름답다고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본인의 삶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겠다고 할까? 아니, 분명 셋 다일 거야. 그는 마땅히 그래야만 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었으니까. 내가 바랄 수 있는 것도 그것뿐이니까.


  ‘신 것을 꾸준히 먹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몸이 된다’는 명목으로 토마토와 레몬, 라임을 즙 내어 섞은 음료가 한 달 가까이 조찬에 올라왔을 때 나는 그것을 한입에 넘기며 눈살을 찌푸렸다. 혀뿌리 끝에는 씁쓸한 맛이 몇 번을 닦아내도 남아 있었고, 매일 위장이 쓰라린 감각에 시달렸다. 참 역겨웠고 지겨웠다. 식이 다가올수록 나는 나의 인내심이 바닥나는 것을 느꼈다. 부부의 서약과 함께 이야기가 끝을 맺고 고양감을 느끼며 뒤표지를 덮을 수 있는 건 그것이 단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야기 속의 사람이 아니었고, 모든 것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는 혼인의 마법은 실은 마녀의 저주일지도 몰랐다. 나는 소금으로 혀끝을 비비고 구역질을 하면서, 막연한 기대감과 불안감 속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왕복했다. 만일 그가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내가 가장 소중하게 지켜온 것을 가져간 남자가 사실 그만한 가치가 없다면?

내가 그러기 시작한 순간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물을 주고 말을 걸어 주었던 정원의 꽃이 어느 날 꺾여 식탁 위의 꽃병 속에 덜렁 놓여있는 걸 본 순간이었던가? 아니면, 애써 놓은 자수에 사용인이 실수로 흘린 구정물이 묻어 어여쁜 제비꽃색의 실이 도축업자의 더러운 앞치마 같은 색이 되었던 순간이었던가? 그 시절의 나는 조금… 혼란스러워서, 시시때때로 얼굴도 모르는 남자를 향한 분노에 시달리곤 했다.

  기울었던 달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던 밤에 나는 시중을 드는 시녀를 물리고 치마를 걷었다. 내가 아끼던 것을 망가뜨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응당 나여야만 했다. 이 세상에 그럴 자격이 있는 자는 나와 나의 어머니뿐이다. 이걸 이제야 깨달은 나의 어리석음에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허공을 맴도는 손가락을 다리 사이에 집어넣었다. 손끝에 버석하게 마른 살갗이 만져졌다. 막상 이곳을 어떻게 망가뜨려야 할지 몰라 무작정 손에 닿는 곳을 문지르며 틈이랄 것을 찾아 벌렸다. 손가락이 들어가자마자 불쾌한 이물감이 들었다. 역시! 난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이런 이물감을 다른 자에 의해 처음 겪었다면 난 무척 짜증 났을 것이다. 일단 속을 헤집고 나니 무엇인지 모를 진득한 액체가 나와 점점 안쪽을 수월히 문지를 수 있었다. 기분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손목이 뻐근해져 올 때쯤 손을 빼내었다. 손이 지저분해졌지만 한 달간 들었던 수업과는 달리 피 같은 건 묻어있지 않았다. 망가뜨리고 나니 이건 참 별것도 아니었다.


  나는 낮에 수업을 들으며 하얀 드레스를 맞추고, 시녀들과 약혼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를 사랑하다가 밤이 되면 그를 증오하며 내 자신을 더럽히는 짓을 반복했다. 식까지 일주일 남짓이 남은 오늘도, 남자의 고함 소리가 들리기 직전까지 나는 그 짓을 하고 있었다. 이 집에서 고함을 지를 수 있는 남자는 단 한 명뿐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석찬에서 아버지가 여섯 번째 부인을 불렀었지. 이쯤 되면 그냥 내쫓는 편이 나을 텐데. 흥이 깨진 나는 침대의 지붕을 가만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열어놓은 창 사이로 익숙한 궐련의 향이 났다. 나는 이 향이 참 싫었다. 죽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자가 살아있다고 표를 내는 것 같았다. 그 무엇도 아닌 연기 따위로 살아있다는 발악을 하는 것이 싫었다.

이딴 것 말고 꽃향기를 맡고 싶어, 살아있는 꽃의 향기가. 나는 돌연 침대에서 일어나 협탁 위에 놓인 작은 등불을 낚아채고 방문을 열었다. 바닥에 조금도 끌리지 않고 사뿐히, 카펫을 지르밟는 소리가 계단에 퍼졌다. 복도에서 꾸벅꾸벅 졸다 나를 보고 놀란 사용인의 시선도, 누군가 밀회를 즐기며 내는 소리도, 홀로 남은 여자의 통곡하는 흐느낌도 무시한 채 나는 정원의 문으로 향했다.

 

  정원은 여름이었고, 태양의 계절을 맞아 그 속에는 장미 화단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낮과 달리 달빛 아래에선 하얀 꽃잎의 장미가 가장 아름답게 빛났다. 나는 꽃잎에 얼굴을 묻고, 코가 아릿해질 만치 그 향을 맡으며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었다. 내가 꽃향기를 맡으며 시간을 보낼 때면 어떤 이는 참 우아한 취향이라 하였고, 다른 이는 참 뻔한 취향이라 하기도 했다. ‘아가씨다움’을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꽃을 좋아했다. 벌과 나비를 꾀기 위해 땅속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두꺼운 줄기를 매섭게 세우곤, 앞다투어 더 큰 잎을 펼쳐 햇빛을 빼앗고… 그 모든 것을 숨기고 모든 저택의 정원에 존재할 만큼 사랑스러울 수 있다는 점을. 나는 눈으로 저택의 벽을 타고 올라가는 장미 덩굴을 쫓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면 시선 끝에 테사 콜슨이 있었다.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방 안에서, 창틀에 기대어 몇 번째인지 모를 궐련을 피우는 그의 얼굴엔 긴 생채기가 나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진 채, 하염없이 어린 시녀를 기다리고, 그 시녀마저 그를 제때 찾아오지 않고….

  나는 테사 콜슨을 동정해야만 했다. 그를 나에게서 유리된 세상에 가두고 이 저택의 모든 여자들처럼 그마저 미치고 말았다며 장례를 치러주어야 했다. 하지만 달빛이 비추는 그의 망가진 뺨은 이 장미 꽃잎만큼이나 아름다웠고, 연기에 가려진 지친 눈동자는 한때 희망이란 걸 담아보았던 그릇처럼 반질거렸다. 천지간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그는 그럼에도 어딘가 다르게 보였고, 나는 그의 그런 모습에 속아 넘어가면서도 나와 그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의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주고 싶었다. 그를 자매라고 부르며 내일에 대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여름엔 어떤 꽃이 가장 예쁜지, 가장 입에 맞는 과일은 무엇인지, 애정하는 노래 선율은 무엇인지 따위의 이야기를. 나는 그를 바라보며 허공에 질문을 던졌다.

  “너의 어머니는 왜 네가 그렇게 되도록 두었어?”

  그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질문에 답하지도 않았다. 그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궐련의 재를 털어내고선 다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그의 눈동자에서 그의 조용한 대답을 보았다.

  '그 사람도, 나도…… 견딜 수 없었거든.'

 


  그날 밤 나는 이 오랜 방황의 해답을 찾고야 말았다. 나, 한나 콜슨은 이 저택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낯선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영영 이 저택의 사랑받는 딸로, 사랑받는 자매로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내 앞에 놓인 선택지 중에 ‘사랑받으며 저택에서 지낸다’는 것은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답 중 하나는 '아직 사랑받을 수 있을 때 이곳을 떠나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는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이곳에 남아 함께 망가져 가며 사랑받기를 포기하는 것'. 이 저택은 오답과 고르지 못한 답들의 구렁텅이였다. 나의 미래와 과거, 현재가 뒤섞여 망가져 버린 초상화였다. 잃어버린 것을 놓지 못해 주변을 미치게 하는 어머니도 나였다. 저택의 어여쁜 장식물로 걸려 있는 어머니도 나였다. 사랑받지 못해 미쳐버린 추한 어머니도 나였다. 잊혀지고 썩어가는 어머니도 나였다. 이상은 높았지만 무참히 실패해버린 어리석은 어머니도 나였다. 테사 콜슨은 나였다. 그 속에서 나만은 무언가 다를 거라고 착각했던 내가 가장 미친 여자였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어머니!' 문간에서 괴한을 마주했을 때처럼, 깊은 밤 악몽을 꾸었던 때처럼, 견딜 수 없이 두려워 누군가에게 안기고 싶은 어린아이의 기분이 들었다. 밤공기를 가르며 저택의 문을 열어젖히고 계단을 미친 듯이 올랐다. 낡은 나무 이음새가 삐걱이는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렸다. 아가씨!”  놀란 사용인이 숨죽여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리고 계속 달렸다. 어머니의 초상화가 걸린 복도를 지났다. 나의 어머니, 그녀에게 안길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다 괜찮을 것 같았다. 

  어느덧 나는 3층의 끝 방에 도착해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간에 서서, 헝클어진 긴 머리를 어깨 위로 드리우고서. 구태여 더 아름답기 위해 엉킨 것들을 빗어내지 않고서. 내가 오리란 것을 알고 있던 사람처럼.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느끼며 정신없이 바람을 가른 내 몰골이 얼마나 엉망일지 떠올렸다. 얼굴은 붉고, 흑색 머리카락은 부스스하고, 네글리제는 구겨지고, 등은 땀에 절고, 흰 발은 온통 더러워지고……. 어머니가 보았다면 다정히 꾸중해 주었을 모습. 그 모습을 보고 나의 어머니는 팔을 뻗어 나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흉이 길게 그어진 얼굴로, 그는 내게 나지막이 속삭여주었다.


  “그래도, 한나.”
  “결혼… 축하해.” 


  울고 있지 않은 그 아래서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젠 다 싫어!"
  외마디 비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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